북덕 바람

어머니가 살고 계신 동네 근처로 근무지를 옮겨 일 년을 살았다. 떨어져 있을 때는 혼자 계신 어머니에게 늘 미안할 뿐이었는데, 막상 함께 살게 되니 괜한 일로 속상할 때가 많았다.

작년 김장철이었다. 퇴근하고 대문을 들어서니, 여기저기 배추 이파리와 김장용 비닐 같은 것들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어머니가 또 혼자 기어코 김장을 시작한 것이다. 수돗가 커다란 물통에 소금 간을 절인 배추가 가득 차 있는 걸 보니 왈칵 화가 났다.

“지금 혼자 뭐 하는 겁니까?”
“내일 모레 비도 오고 더 추워진다고 해서….”
“김장은 다음 주에 다 같이 하기로 약속했잖아요!”

어머니는 작년에도 혼자 김장해서 우리들 애간장을 태웠다. 올해는 제발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또다시 혼자 김장을 시작한 것이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어머니가 모기 소리만 하게 말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배추 간물 씻어낼 때 자네가 좀 도와주게.”

나는 들은 척 만 척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슬그머니 거실로 나가보았더니, 거실에 빨간 고무장갑과 털모자와 마스크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어머니도 완전 무장을 하고 조용히 텔레비전 앞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어두워져가는 마당에서 찬물에 배추 포기를 마구 흔들어 헹구었다. 하지만 갑갑한 내 속의 간물은 빠지지가 않았다. 배추 전쟁은 밤 아홉 시가 넘어 끝났다. 어머니는 말했다.

“아이구, 됐다. 이제 시나브로 양념만 치대면 된다.”

나는 아침까지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 대신 “나, 갑니다” 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듯 대문을 나섰다. 그런데 퇴근하고 돌아오니 저녁상에 몽어회 한 접시가 올라와 있었다.

새벽 시장에 가면 갯가에 사는 할머니들이 싱싱한 어물을 팔았다. 그중 갯벌에 쳐놓은 발에 걸린 잡어들은 진짜로 싸고 싱싱한 횟감이었다. 어머니는 몽어새끼 삼천 원어치를 사와서, 냉장고에 넣어 두고 나를 기다렸다. 저녁 반주 삼아 꼬들꼬들한 몽어회를 곁들여 소주 한잔을 털어 넣었더니, 뭉쳤던 화가 스르르 풀려 내려갔다. 참 신기했다. 나는 가끔 그렇게 내 풀에 토라졌다가 풀어지곤 하였다.

어느덧 파견 기간이 끝나고 원래 살던 곳으로 복귀할 때가 가까워졌다. 새벽녘,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었다. 어머니가 비설거지를 하나 싶어 불을 켜보니, 당신은 아랫목에 콜콜 잘 주무시고 있었다. 가만 들어보니 바람 소리였다. 밤바람은 괜히 유리창을 툭툭 치고, 낡은 창고 문을 흔들고, 마당에 있던 고양이 밥그릇을 끌고 다녔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마당으로 나갔다. 고양이 밥그릇을 제자리에 두고, 거름통 앞에서 허리춤을 풀고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금이 간 듯 여기저기 샛별이 반짝였다. 도깨비 같이 바람이 뒤로 돌아와 내 등을 밀었다. 하지만 소리만 컸지 하나도 맵지 않은 특이한 겨울바람이었다. 방에 들어오니 어머니도 잠을 깼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바람이 왜 저렇게 유별하게 분답니까?”
“북덕 바람이여.”
어머니는 그 바람을 내게 말해주었다.

옛날 손으로 농사짓던 시절, 늦가을 벼를 타작할 때 부는 바람이라고 했다. 해가 떨어지는 벌판에서 불어오는 그 바람은, 지푸라기와 검불은 멀리 날려 보내고 알곡만 떨어지게 할 만큼만 불었단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도 북덕 바람이 불었다. 내 부끄러운 잡념을 검불처럼 날려 보내고, 알곡 같은 모정(母情)만 고스란히 남겨주었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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