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일을 한다는 것은우리 인생의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자, 축복일 것입니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해준 나의 일

김영주 61세. 상품 검수원. 전남 나주시 이창동

근 30년 동안 몸담아오던 직장을 명예 퇴임으로 끝내고 자연인으로 돌아온 날, 거울 앞에 비친 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아직은 생기 잃지 않은 동안의 얼굴 그대로인 것 같은데 그동안의 삶의 굴레에서 찌든, 연륜이란 나이테만은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혼자 씁쓸한 미소를 지어본다.

그동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던 보일 듯 말 듯한 삶의 과제들이 갑자기 큰 빙산으로 변하여 비좁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에 깊은 심호흡을 해본다.

80년대 초 32세 나이로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다 만난 아내와 사내 커플로 결혼했던 신혼 때만 해도 사랑 하나로 모든 것을 초월하여 사글세 단칸방에서도 행복했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로 가정이란 보금자리를 꾸려 나갔다.

하지만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하나 둘 아이들에게 맞추어 살아야 하는 환경을 갖추어야만 했다. 좋은 환경에서 남들보다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직장에서 빌린 돈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위하여 아파트를 장만했다.

결혼하면서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고 두 아이를 키우는 데 전념했다. 덕분에 시골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두 아이 모두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서울에서 자식 하나 가르치기도 벅찬데 둘을 서울로 보냈다고 대견스럽다고 했다. 어느새 직장인으로서 삶의 목표가 두 아이를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 아이가 군 제대 후 대학을 복학하고 졸업을 눈앞에 둔 2010년, 57세 나이로 직장 정년을 하게 되었다. 사전에 예견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예습, 복습 없이 치러야 했던 학창 시절 시험 보기 전의 마음처럼 당황스럽기만 했다. 모든 것이 어려운 난관처럼 느껴졌고 해보고자 하는 일들마다 너무나 생소하고 비좁은 틈새가 되어 눈앞에 다가왔다.

정년을 맞기 전에 제2 인생을 위하여 무언가 준비하라던 선배들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던 시간들이 후회스러웠다. 차분한 마음으로 휴식을 가지면서 미래를 지켜보라는 지인들의 위로마저 해석하기 힘든 어려운 영문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아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한 심정으로 구인, 구직란을 뒤져보고 먼지 묻은 명함집 속의 명함들을 하나하나 넘기면서 혹시 하는 기대감으로 가슴 졸이던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60세를 앞둔 고령자를 채용해주는 기업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으며, 더욱이 왜소한 체격에 사무직만 근무했던 탓에 노동을 제공하고 보수를 구하는 직업은 더욱 쉽지 않았다. 그때 마침 지역 개발을 위해 지자체를 통한 직업 훈련소가 지역 내에 개소되면서 인터넷 활용 기술과 전기 용접 등 취업에 필요한 교육을 수강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역 내 실업자 구제를 위한 외부 기업 유치와 동시 지역민에 한하여 고령자 몇 사람을 채용해 주면서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도시 물류 회사를 통하여 공급했던 생활필수품을 지역에서 직접, 도내 편의점에 납품하는 과정에서 상품을 검수하는 일이었다. 퇴직 전 직장에서 18년 정도 담당했던 상품 구매 및 마트 점장 경력이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비록 전 직장에 비하여 모든 조건이 열악했지만 인생에 있어 가장 궁색한 처지를 경험했던 나에게는 한 올의 생명줄마냥 귀하고 감사했다. 그런 마음으로 맡은 바 업무에 최선을 다하자 직장 내 우수 사원으로 꼽히게 되었고, 그렇게 우수 사원으로 근무한 지 벌써 2년이 훌쩍 지나고 있다. 스스로 노력한 자만이 얻어진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제2 인생을 시작하면서 가장 보람 있을 때는 뒤늦게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학교 급식원으로 취업한 아내의 거칠어진 두 손을 포근하게 감싸줄 수 있는 따스한 활력소가 되어줄 때이다.

김은술 작.
<Move1-도시여행2>
130×162cm.
장지에 채색. 2007.

나는야, 피아노들의 의사 선생님

안현수 44세. 농부, 피아노 조율사. 경남 함안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는 참 좋다. 마음이 편안해지며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길을 걷다가도 맑고 경쾌한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잠시 멈추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 강당 청소하러 갔다가 학예회 연습하는 피아노 소리에 처음 반한 것 같다.

그리고 나와 피아노의 인연은 군 제대할 즈음 이루어졌다. 우연찮게 종로구 낙원상가에 가게 되었다. 한 모퉁이에서 피아노 조율하는 조율사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아~저거야’ 하는 느낌이 왔다. 어릴 때부터 뜯어고치고, 조립하고 만드는 것을 좋아했는데 피아노를 고치는 의사라는 직업이 마음에 다가왔다. 그 후 좋은 선생님 밑에서 열심히 배우고 기술을 익혀, 20대 후반부터 피아노 조율사로 살아왔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며 조율사로만 살 수가 없어 다른 일을 병행하면서 요청이 오는 곳으로 피아노를 고치러 가곤 했다.

그러다 30대 후반부터 복지 단체나 시골의 작은 학교, 교회 등의 피아노를 고쳐주는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 봉사 활동을 간 곳은 고성에 있는 ‘보리수동산’이었다. 여학생실과 강당에 있는 피아노를 손보게 되었다. 여학생실에 갔는데 한 여학생이 “아저씨 건반 몇 개가 소리가 안 나요. 제발 연습 좀 하게 해주세요.” 부탁했다. 얼마나 연습이 하고 싶었으면….

피아노는 정말 엉망이었다. 약음페달이 고장 나 있고, 의자 경첩도 없었고 먼지도 가득했다. 몇 시간 먼지도 마시고, 땀을 흘리며 고쳤다. 피아노 소리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곳의 사람들에게 페달 사용법, 피아노 관리 요령 등도 설명해주었다.

“고맙다. 감사하다”며 잠시 후에 삼삼오오 피아노에 앉아서 연주도 하고, 웃음꽃도 피우는데 그때의 행복함이란….

봉사 활동을 가보면 외형은 번지르르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해서, 피아노를 뜯어보면 먼지, 곰팡이, 현이 녹슬고 끊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철 지난 연예인 사진, 동전, 지우개, 잡동사니가 나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한바탕 웃게 된다.

쓸쓸하고 적막하게 느껴졌던 피아노를 보면 ‘너도 내 손길을 기다렸구나’ 하며 피아노와 대화를 한다. 그리고 피아노를 분해해 진공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내고, 혼신의 힘으로 새 생명을 불어넣고 나면 피아노도 나에게 뜨거운 인사를 건네는 거 같다.

한번은 피아노 부품 중에 브라이들 테이프라는 게 있는데 여든여덟 개를 쥐가 갉아 먹어 엄청나게 고생했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다 완성된 후 다음 주 졸업식이 열렸다. 그때의 감동이란.

그 이후로 일 년에 두세 번씩은 봉사를 하러 가곤 한다. 피아노가 고장 났다는 연락을 받으면 어디든 간다. 난 피아노 의사니까. 죽어 있는 피아노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아프리카 박애 사업에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는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좋은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피아노 봉사를 다녀오면 나도 절로 그런 말을 하게 된다. 오늘도 난 공구 가방을 싣고 어디론가 떠난다.

김은술 작. <소풍>
91×72cm.
장지에 채색. 2011.

나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옥순 54세. 케어보호사. 경남 김해시 진영읍

먼동이 트면 먼저 일어나 따뜻한 수건으로 얼굴 닦아드리며
“어르신 또 하루를 시작하는 해가 밝았습니다”고 인사하는
나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한 끼의 식사도 거르지 않게, 한 번의 약도 빼지 않는 나는
어르신의 손이 되고 귀가 되고 발이 되고 추억이 되는
나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손들이 마다하는 어르신의 뒤처리를 마다하지 않는
나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귀들이 들어주지 않는 끝없는 도돌이표 같은 얘기를 들어드리는
나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폐허 기둥 같은 앙상한 등에도 마른 낙엽 서걱거리는 듯한 살결에도
향기 나는 비누로 몇 번이고 닦아드리는
나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루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면 무사히 하루를 보낸 세월 속에
또 하루가 포개어지는구나, 그래서 당신은 나의 거울입니다.
오늘도 그 거울 속에 나를 단장하고 옷깃을 여미고 미래도 봅니다.
어르신 삶에 마지막 인연인
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김은술 작. <소풍>
91×72cm.
장지에 채색. 2010.

글 쓰는 직업을 갖기 위해 나는 그러했나 보다

장희지 27세. 작가 지망생. 대구시 북구 고성동3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릴 때부터 공상에 잘 잠겼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않고 멍하니 다른 생각에 빠지고 길을 걷다가도 머릿속에는 온갖 상념이 가득했다. 틈만 나면 딴생각을 하는 것은 버릇이었고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밤이 되어 자야 할 때도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녀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불면증 아닌 불면증을 달고 살았다.

한편 해가 거듭될수록 기억력이 떨어졌다. 예전에는 기억력 하나만큼은 좋다고 자부하여 연필을 잡고 필기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웬만하면 외워야 할 내용은 머릿속에 입력하는 방법을 편하게 여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에 있던 내용을 잘 잊고 기억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머릿속으로만 외우는 방식에 한계가 나타났다. 생각은 많아지고 기억력은 감퇴하자 자연스레 고민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귀찮게 여겨지더라도 기록을 하면서 기억력을 보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기록하는 습관은 내 머릿속의 공상을 끄집어내는 단계로 이어졌다. 이렇게 하여 나는 글을 쓰게 되었다.

이전까지 글을 쓰거나 좋아해본 적도 없는 내가 처음으로 글쓰기에 관심을 지니는 계기가 생겨났고 의외로 예상 이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은 점차 습관이 되었고 분량은 짧지만 정성을 들여 완성한 한 편의 글이 탄생하면 뿌듯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자유롭게 글을 기고하게 되었다. 주제가 정해지면 그 주제에 맞게, 주제가 없다면 내가 펼치고 싶은 대로 글을 썼다.

글을 쓰면 쓸수록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 심도 있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마침 직장에 다니는 것을 지겨워하며 내키지 않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고민은 매일매일 이어졌다. 수많은 고민 끝에 직장에 다니는 것은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내게 아무런 의미와 보람도 느낄 수 없는 일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직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바탕으로 글을 쓰며 살기 시작하자 새로운 삶이 다가왔다. 예전과 다르게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생겨났고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학교나 직장에서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살아온 내가 글을 쓰면서 조금이나마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변화도 나타났다.

더불어 꿈이라는 것도 생겼다. 동화, 영화 등의 작품을 완성하여 공모전에 도전하고 당선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다가 문득 내가 글을 쓰며 살아가려고 어릴 때부터 난데없는 생각을 하였던 것은 아닌지 하는 확신이 조금씩 생긴다. 그리고 건망증이 시작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라고 본다. 앞으로도 아니 아마 평생 글을 쓰며 살지 않을까 상상을 해보며 또 다른 글을 쓸 생각에,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김은술 작. <소풍2>
91×116cm.
장지에 채색.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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