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작은 약속이 큰 기적을 만들 것 같은 이 가을, 우리들의 약속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평생을 걸고 지키신 아빠의 약속

구자숙 36세. 직장인. 인천시 부평구 산곡3동

아빠는 아빠의 삶에 대해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진 않았다. 가끔 내가 우리 아기를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한마디씩 하실 때 아빠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짐작할 뿐이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너무 어릴 적의 심한 고생은 마음에 깊은 상처가 돼서 평생 맘속에 남아 있어. 너무너무 가난해서 고생 징하게 했지. 나는 엄마한테 아주 많이 맞으며 커서 엄마 품 좋은 줄 모르고 컸지.”

아빠가 해주신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지고 추측해 보면 할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고생만 하다가 일찍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돈벌이를 거의 못하신 듯하다. 그래서 첫째인 우리 아빠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일을 하면서 밑에 동생들을 다 거둬야 했나 보다. 아마도 아빠는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기는커녕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고 외롭게 컸지 싶다.

그렇게 부모 사랑 모르고 험하게 살아온 아빠였지만 나는 크면서 아빠로부터 험한 말 한번 들어본 적이 없다. 중3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우리 가족 모두 몹시 힘든 시간을 오랫동안 견뎌내야 했을 때조차도 아빠는 우리에게 힘든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다. 예전에는 한두 잔이었던 반주가 소주 반병쯤으로 늘어나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아빠는 정말이지 열심히 일하셨다. 한 해에 한 번씩 꼭 도지는 허리 병 때문에 하루쯤 일을 쉬는 날이 아빠가 낮에 등 붙이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아빠는 돈벌이가 되든 안되든 정말이지 열심히 일하셨다. 그리고 아빠는 절대 빚을 지지 않으셨다. 그야말로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번 만큼만 쓰며 산 셈이다. 당연히 사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것을 거의 참아가며 살아야 했던 그 시절, 그로 인한 불만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보니 아빠가 왜 그토록 빚을 지지 않으려고 하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아빠가 빚이 있는 채로 나이가 들면 그건 모두 자식들 몫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으리라. 늦은 밤, 일을 마치고 들어오시면 못이 박여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잠든 우리들 등을 쓱쓱 쓸어주셨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묵묵히 키워오셨다.

이제는 나와 두 동생들 모두 결혼을 해서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 아빠는 자식들을 다 키운 셈이다. 그런데도 몇 년 전까지도 이삿짐센터에서 자동차를 고치고 사다리차를 운전하고 이삿짐을 나르는 일을 했다. 내가 아빠가 하는 일은 자동차를 고치는 일인데 왜 운전하고 짐 나르는 일까지 다 하냐고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아빠는 이 나이에 돈 받고 일하려면 시키든 시키지 않든 눈에 보이는 일은 다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자기 힘이 닿는 데까지 일을 하다 그만두신 다음에는 당신이 간절하게 바랐던, 그러나 자식들 때문에 미뤄왔던 자기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계신다.

한자 공부 삼매경에 빠져 밤낮없이 공부를 하더니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까지 자격증을 얻으셨고, 저소득층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한자 교실에도 나가시고 초등학교 방과 후 활동으로 한자도 가르치신다. 문화원에서 하는 한시 공부도 즐겁게 하고 계신다. 또 굴삭기 운전 자격증을 따려고 공부 중이시다. 그리고 아빠가 진짜로 하려고 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흙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는 일이다.

아빠가 그리는 그림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한자를 가르치는 것도 있을 것이고 우리 엄마 묘가 있는 선산을 굴삭기로 예쁘게 더 아름답게 가꾸는 일도 있을 것이다. 요즘 아빠의 모습은 정말로 행복해 보인다.

아빠를 보면 늘 지울 수 없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삼촌이 어느 날 아침 우리를 낮은 목소리로 흔들어 깨웠다. 엄마가 지난밤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한다. 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나는 들어가면 사실이 될까 봐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다가 삼촌이 끌다시피 해서 들어가니 아빠가 고개를 숙인 채 의자에 앉아 계셨다. 고개 숙인 아빠 모습은 그날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우리 셋은 아빠에게 달려갔고 아빠는 우리 셋을 팔로 감싸 안아 등을 쓸어주면서 한마디 한마디 정성 들여 말씀하셨다.

“걱정 마라. 아빠가 엄마 몫까지 할 거니까 아무 걱정 마라.”
아빠는 그 약속을 정말로 자기 인생을 걸고 지키셨다.
“아빠. 정말 고마워요. 아빠가 계셔서 나도 있는 거예요.”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작.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인(카미유와 장)>

100×81cm. 캔버스에 유채. 1875.

워싱턴 국립미술관.

지리산 종주, 천왕봉에서 한 나와의 약속

임경철 47세. 인천시 서구 불로동

8년 전, 내 나이 40세 되던 해 나는 2박 3일간의 지리산 종주를 시작했다. 50여 분을 걸어 노고단에 도착, 하늘에 제를 지내던 노고단 돌무덤에서 겹겹이 포개져 있는 지리산의 영봉들을 바라보자니 그 산세의 위용과 백두대간의 장엄함이 나를 압도했다.

이제 지리산 정상을 향한 험하고 외로운 25킬로미터의 단독 종주 길이 시작됐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서 지난 5년간 힘겨웠던 자영업 생활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대학 졸업 후 내로라하는 대기업에서 8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었다. 밖에서는 대우 좋고 연봉 높다고 부러워했지만 내부 조직 생활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타이트했고, 매일 반복되는 야근으로 인한 건강 악화, 그리고 힘든 직장 선배를 만나 어려운 고비를 넘기지 못한 채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전혀 경험이 없는 생계형 자영업을 하게 되었다.

근면 성실하면 성공하리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열심히 살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활비조차 빚이 되는 지경이었다. 그 지옥 같았던 5년, 수없는 좌절과 낙심 그리고 적지 않은 수업료를 지불하고 모든 것을 정리한 후 지친 몸과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지리산을 종주하게 된 것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단한 인생길처럼 수많은 봉우리와 능선을 넘으면서 이미 병들어 버린 내 육신은 더욱더 혹사되었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한없이 맑아오는 듯한 느낌은 왜일까?

승승장구하던 직장 생활, 모든 것이 자신만만했었기에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는 부조리한 세상을 탓하고 나와 생각하는 것과 다르면 모두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세상에 독기를 품기도 했었다.

그렇게 지난 힘든 시간들을 되새기며 10킬로미터 정도를 지나자 무릎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고,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가자니 너무 많이 와버렸던 상황.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이제 남은 절반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궁여지책으로 무릎에 손수건을 동여매고 산행을 계속했다. 지리산 종주 코스에서 가장 힘들다는 마의 코스를 지나면서부터 나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국 천왕봉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장터목산장에 이르렀을 때는 결국 해내고 말았다는 감동과 희열을 느꼈다. 장터목산장은 그야말로 삼대가 덕을 쌓아야만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 하여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나는 다시 천왕봉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장터목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구간은 경사가 가파르고 고산지대라 힘에 겹지만, 그래도 꼭 정상을 밟아보리라, 패배 의식과 나약한 정신을 버리고 성취욕을 느껴보리라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나에게도 허락한 정상, 천왕봉 그리고 일출. 마침내 해가 떠올랐고, 무한 감동이 밀려왔다. 지난 2박 3일간의 고행길이 한순간에 잊혀졌다!

감격의 해돋이를 맞이하고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게 천왕봉 주변 바위에 걸터앉았다. 지리산 천왕봉은 나에게 조그만 것을 빼앗겨도 분해하지 말라고 타이르는 듯했다. 지리산의 은혜를 입어 지혜로운 사람이 되리라 다짐하며 나는 나와의 약속을 하였다.

첫째,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여기 바위나 나무처럼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인내하리라. 둘째, 세상과 부딪쳐 싸워 이기려 하지 말고 낮은 자세로 더불어 살리라. 셋째, 남은 인생 이토록 아름다운 우리의 강산을 둘러보며 자연의 진리를 배우리라. 넷째, 건강해야 이 모든 것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으므로 틈틈이 몸 관리를 하리라.

그렇게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반환점을 돌며, 남들보다 뒤처졌다고 실망하고 좌절했던 마음들을 정리하며 지리산 종주를 갈무리했다. 그 후 8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크고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천왕봉에서 한 나와의 약속을 되새기며 크나큰 위로를 삼았다.

앞으로도 그때의 감동과 약속을 절대 잊지 않겠노라 다짐해 본다.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작.

<베퇴유의 모네 집 정원> 151.4×121.

캔버스에 유채. 1880.

내셔널 갤러리.

(A. 멜런 브루스 컬렉션), 워싱턴.

그 아이들을 위해 나의 모든 걸 나눌 겁니다

권희재 25세. 대학생. 서울시 강동구 암사2동

2년 전, 군에서 전역하며 들었던 생각은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세상과 부딪쳐보고 싶다는 거였다. 돈 300만 원으로 시작된 목적지 없는 여행. 부모님은 외동아들의 여행을 만류하셨고, 그런 부모님을 뒤로한 채 여행은 시작되었다.

오랜 시간을 경유한 끝에 미국 LA에 도착하니 정말 막막하였다. 첫날부터 잘 곳이 없었기에 공항 내 벤치에서 노숙하고, 화장실에서 세안을 했다. 거울에 비춰진 어색한 내 모습을 보며 ‘젊어서 고생 사서도 한다’는 말로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나가는 차를 운 좋게 얻어 탄 뒤부터, 누군가의 차에 같이 타게 되는 히치하이킹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돈을 최대한 아껴야 했기에 바나나와 빵 그리고 수돗물로 끼니를 때워야 했지만 너무나 행복한 미국 횡단 여행은 계속됐다.

여행을 통해 수많은 친구들과 여행자들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으며 나는 인류애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날 믿어주고 자기 집에서 2주 이상 머물게 해주었던 친구들, 차에 타라고 손짓을 건네던 수많은 자동차들, 그리고 힘들지 않느냐며 손을 건네주셨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그때 받았던 은혜들을 내가 살면서 다 갚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렇게 LA에서 보스턴까지의 횡단 여행이 끝날 무렵 문득 ‘아마존에 가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쥐어짜낸 돈으로 남미 여행을 시작하며,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만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만남은 페루 한 시골 마을에서 전문 산악 장비와 준비 없이 안데스 산맥을 오르다 고산병을 얻으며 시작되었다. 빈민굴 같은 호스텔에 머물렀던 나는 그곳을 관리하던 15살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소녀는 고산병에 걸려 끙끙거리고 있는 나를 수녀님처럼 간호해 주었다. 고산병에 좋은 차를 끓여주고, 따뜻한 죽을 만들어주었다.

친해진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3층이나 되는 호스텔을 하루 12시간 이상 청소하고 관리한다고 했다. 중노동을 하면서 한 달에 버는 돈은 우리나라 돈으로 약 15만원. 소녀는 호스텔과 집까지 약 2시간 거리인데도 버스비가 아까워 걸어 다닌다고 했다. 15살 소녀의 손과 발은 서커스단 코끼리 발처럼 퉁퉁 부었고 온통 상처뿐이었다.

그 소녀를 뒤로한 채 남미 최대 빈민국인 볼리비아로 떠난 나는, 두 번째 가슴 아픈 광경을 만나게 되었다. 거리의 고아들이 서로 뭉쳐 다니며 지나가는 이들의 구두를 닦아 돈을 벌고 있었는데, 차가운 돌바닥에 엎드려 구두를 닦던 고사리 같은 손들은 온통 새까만 구두약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아이들은 하루 종일 일하면 잘 벌어야 700원을 번다. 그에 비해 나는 아무리 아껴 써도 하루에 3천 원. 그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었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

나는 그 아이들을 보며 나 자신과 약속했다. 세상에 던져진 아이들을 보호하고,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나눠주겠노라고.

지금 생각하면 약 6개월간의 여행은 작은 강에만 살았던 나라는 물고기를 커다란 세상이란 바다에 도전하게 만들어주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현재 나는 국제기구에 들어가려 부단한 노력을 하는 한편, 아이들을 도와줄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다. 대학생들이 무동력으로 여행을 할 때 km당 일정 금액을 후원받아 제3국의 빈민을 도와주는 프로젝트다. 지금은 이 프로젝트를 같이할 기업을 찾고 있는 중이다. 무언가를 진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구 반대편 아이들과의 약속이기에 나는 계속 꿋꿋하게 전진할 것이다.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작.

<버드나무 아래 앉아 있는 여인> 81.1×60cm.

캔버스에 유채. 1880.

내셔널 갤러리.

(체스터 데일 컬렉션), 워싱턴.

할아버지 할머니, 꼭 올림픽 금메달 걸어드릴게요

김광규 16세. 온양중학교 유도부, 전국소년체전 금메달리스트

아테네올림픽에서 이원희 선수가 금메달 따는 걸 TV로 보고 한눈에 빠졌다. 결승전에서 기술을 딱 해내고 이기고 나서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감동적이었다. 바로 유도 체육관으로 찾아갔다. 유도를 하고 싶다고. 그때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배우겠다고 한 마음이 참 신기하기도 하다.

나는 엄마, 아빠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나를 키워준 분은 외증조할아버지, 할머니시다. 두 분이 잘해주셔서, 부모님의 빈자리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고 그런 마음뿐이다.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면 메달을 할아버지, 할머니 목에 걸어드린다. 나는 꼭 열심히 해서 나중에 올림픽 금메달도 걸어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중학교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중학교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유도부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합숙 훈련을 했는데, 아침 6시에 일어나서 7시까지 새벽 운동을 시작으로 오전에는 수업받고 오후 3시부터 유도를 시작한다. 한 2시간가량 운동을 하고 나면 바로 밥을 먹고, 1시간 휴식을 갖고, 바로 야간 훈련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훈련이 너무 힘들었다. 그때 첨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할아버지 할머니 나 운동 너무 힘든데 그만두면 안 돼?” 울면서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걸 들으신 할아버지는 걱정이 되셔서 바로 나에게로 오신다.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하자.” 이렇게 얘기를 하신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는 나에게 물으신다.
“광규야, 그럼 너의 꿈이 무엇이니?”

번뜩 정신이 든다. 나의 꿈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금메달을 걸어드리는 것이었지. 그렇게 약속을 했었지. 난 공부도 안 된다.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께 보답할 수 있는 길이라고는 유도밖에 없다. 그 약속은 너무나도 힘이 되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유도한다고, 더 열심히 하겠다고 얘기를 했다.

그런 시기가 지나면서 1학년, 2학년의 시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이제 3학년, 나에게는 작은 꿈이 하나 있었다. 바로 42회 전국소년체전에서의 금메달. 두려웠다. 소년체전이 두려운 게 아니고 그 과정이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는 언제나 힘이 되는 것이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했던 약속이었다. 약속을 생각하면서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소년체전 한 달 전, 수업도 안 들어가고 완전 지옥훈련이다. 경사가 높은 산을 정상까지 올라갔다 몇 분 안에 들어와야 하는 기초 훈련 등 기술이 안 되더라도 될 때까지 하는 게 유도다. 온몸이 안 움직일 정도로, 자기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훈련을 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내가 한 단계 발전되었다는 걸 느낀다. 온몸이 아프다, 너무 힘들다, 죽을 것 같아 운동을 쉬고 싶다는 생각도 계속 갖게 된다.

하지만 나는 더 노력했다. 하늘은 노력한 자에게 기회를 주는 걸 알기에. 마침내 소년체전이 하루 전으로 다가왔다. 대진표를 본 순간 좌절하였다. 정말 최악이었다. 하지만 난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힘이 생긴다. 자기 전에 기도를 했다. 1시간가량.
‘하느님 부탁입니다. 꼭 저 내일 좋은 성적 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계속 기도를 하고 잠자리에 편하게 들었다. 소년체전 때 나는 결승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정말 힘들게 그렇게 갈망하던 금메달을 땄다. 믿기지도 않는 일이다. 눈물이 저절로 나온다. 그 결승은 아직도 생생하다. 노력한 자에게 기회가 오는 건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저를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금메달을 걸어드리며 말씀드렸다. 할아버지는 안아주면서 웃으셨다. 그렇게 중학교 목표는 달성했다. 이제 한 걸음 다가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노력할 것이다. 어려운 일이 있고 힘들어도 노력할 거다. 올림픽을 위해서 아니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작.

<수련>

200×200cm. 캔버스에 유채. 1914.

도쿄 국립미술관.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You may use these HTML tags and attributes: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 <strike>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