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요? 나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진짜 나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찡한 이야기들입니다.

 

나는 싱글맘이다

유인숙 52세. 보험설계사. 서울시 송파구 가락2동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진짜 행복이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다. 속물처럼 돈 많은 것만 부자인 줄 알았다.

결혼 4년 차인 어느 날 나는 가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은, 모든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좇아 집을 나갔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그때까지 나에게 하늘은 남편이었다.

남편이 없는 빈자리는 너무나 커다란 구멍이 되어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난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는, 5남매 중 막내로 귀하게 자란 말하자면 공주과였다.

내게 가장이란 무거운 짐은 고통이었다. 옆에는 6살짜리 딸과 3살 난 아들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이럴 때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하나 보다 싶었다. 하지만 나에겐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었기에 선택을 달리할 수 있었다.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던 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네 옆에 놓인 보물을 보라.’ 거기엔 예쁜 우리 아기 둘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싱글맘이 되어 열심히 살자 다짐하고 전쟁터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보험 아줌마.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서 아이 키우는 데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처음엔 아는 사람도 없고 갈 데도 없었다. 그래도 회사에서 교육받은 대로 실천했더니 나에게도 나를 믿어주는 고객이 생겼다. 그때부터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 결국 회사에서도 고객들한테도 인정받는 설계사가 될 수 있었다.

그래도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운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학원을 보낼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에. 그때 꿈나무학교라는 방과후학교를 알게 되었다. 그곳에 아이를 맡기고, 낮에는 보험회사로 밤에는 목욕탕 청소를 했다.

처음엔 배신감에, 분노에 쌓여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상상 살인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매일 매일, 순간 순간 기도했다.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미움과 분노는 사라질 줄 모른 채 세월은 갔다. 그렇게 5년이란 세월을 보낸 어느 날 새벽기도 중 또 하나님은 나에게 평안을 주셨다.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 사람을 용서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자유를 얻은 것이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곧 나를 위한 것이구나 깨달았다.

그 사람이 떠나간 지 15년 정도가 흘렀다. 지금은 우리 셋을 버리고 간 그 사람이 고맙고 감사하다. 그런 상황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싱글맘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 속에 잠재하고 있던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해갔다.

일을 하며 틈틈이 사회 활동도 했다. 갑자기 집이 없어지면서, 우리는 무허가에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 시민연대 활동을 했다. 나 같은 여건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을 주말에는 우리 집에서 재우기도 한다. 지금은 지역아동센터 운영위원장, 시민연대 강동송파 대표를 맡고 있다. 이제 ‘구의원’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조직을 이끄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에게 이런 가능성이 있는지 나도 몰랐다.

그 사람에게 또 감사한 것은 귀한 보물단지 둘을 모두 나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사춘기도 무사히 넘기고 지금은 모두 20살이 넘은 성인이다. 내가 주부로만 있었으면 “엄마가 뭘 알아” 하고 지금쯤 대화도 통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아이들은 나에게 “우리 엄마 최고”라며 모든 문제를 상담한다. 그럴 때면 가슴이 뛰고 행복하다. 다른 누구보다 가족에게 인정받는 것이 가장 행복한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위자료를 제일 많이 받은 여자라고 생각한다.

가난하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부유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신철 작 <기억풀이_꽃잎이 피면은> 캔버스 위에 아크릴. 80.3×130.3cm. 2012.

 

나는 라스베가스 DJ

스티븐 오버그(Steven Oberg) 33세. DJ.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가스 거주

붐붐붐붐. 나는 라스베가스 DJ다. 나는 내 일을 무척 사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듯 라스베가스는 오락과 유흥의 세상이다.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많은 매력적인 사람들이 인상 깊은 음향과 화려한 조명 속에서 밤마다 재미난 일들을 만들어낸다. 이런 곳에서 DJ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큰 영광이다.

내가 DJ세계에 첫발을 들인 것은, 1999년이었다. 나는 DJ들의 멋진 솜씨에 푹 빠져 있었다. 그들은 마치 대중들 위에 군림하는 통치자 같았다. 사람들은 DJ란 이유만으로 모두 그들을 좋아해주었다. 강인하면서도 늘 자신감에 넘쳐 보이고, 삶을 즐기는 듯한 그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2년 정도 열심히 연습한 뒤에 마침내 직업으로 해도 되겠다 싶을 만큼 기술이 늘었다는 걸 느꼈다.

점차 좌중을 즐겁게 하기 위한 나만의 방식과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다. 참 놀라운 일도 경험했다. 설명하기는 좀 힘든데, 공연을 하면서, 다음 곡이 그냥 마법처럼 내 마음속에서 튀어나온다. 난 가만히 듣는다. 그리고 그 음악을 튼다. 그러면 그 음악은 항상 분위기에 잘 맞는다. 정말 완벽히 맞는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항상 나의 곡 선정을 칭찬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내가 생각해낸 이론은 이런 것이었다. 클럽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하나의 의식을 만들고, 비언어적인 소통을 통해 내게 다음 곡을 말한다. 마음과 마음끼리의 연결, 이러한 경험은 궁극적인 마음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

DJ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걸 좋아했던 나에겐 딱 맞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에겐 아주 큰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나의 자존심과 열등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늘 고도의 긴장 상태로 DJ를 시작한다. 손은 땀으로 축축해진다. 게다가 난 최고여야 하니 절대로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주 자신감 넘치듯 보인다. 미국에서는 “긴장되더라도 그 모습을 절대 보이지 말라”는 풍토가 있다. 어쨌든 이런 극도의 긴장은 조금 지나면 사라지고, 쇼가 매끄럽게 진행된다.

진짜 문제는 밤을 벗어나면 시작되었다. 밤은 거대한 환상의 세계였다. 그 속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었다. 그 세계를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면, 나는 언제나 방황했다. 나의 자존심과 열등감은 극명히 드러나, 언제나 인정받지 못한다 여겼고, 대화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인간관계가 힘들었다. 행복하지 못했다. 언제나 즐거움을 주는 DJ. 근데 왜 현실에선 나는 행복하지 못할까? 왜? 왜? 왜?

나는 인생의 의미를 찾고 또 찾았다. 그렇게 방황을 하던 중, 우연히 마음수련 안내 책자를 보게 되었고 쭉 읽어본 후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 모든 것의 해답이다!!”였다.

단어 하나하나가 얼마나 나를 감동시키고 해답을 안겨다 줬는지, 정말이지 내 심장과 내면의 자아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여태껏 몸부림치고 있던 방황과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었다. 어쩌면 DJ 생활을 하며 느꼈던 묘한 마음의 현상들이 마음수련에서 이끄는 목적지인 무한대 순수 우주 의식을 알아챌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 같다.

나는 현재 1년째 마음수련을 하고 있다. 나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믿지 못할 정도로 난 많이 바뀌었다. 나도 믿기지 않는다! 나는 지금, 전에는 전혀 없었던 인생에 대한 감사함을 가지게 되었다. 세상은 하나이고 그 하나인 세상을 찾아가는 여정은 그야말로 최고다.

이제 곧 다시 라스베가스로 돌아간다. 아마 저녁과 주말엔 DJ 일을 하고 오후에는 라스베가스 수련원에서 마음수련하는 사람들을 도와줄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마음 버리기를 해서 참에게 찾아가기를 정말 간절하게 바란다.

나의 이름도 DJ Steven Jaye에서 DJ Helper(도우미)로 바꿀 것이다.

“나는 인생을 사랑한다!” “나는 행복함을 사랑한다!” 이제 나는 환상의 세계가 아닌, 진짜 세계에서, 진짜로 행복과 즐거움, 사랑을 전하는 라스베가스의 진짜 DJ Helper다.

 

신철 작 <기억풀이_안녕하세요> 캔버스 위에 아크릴. 45.5×53.0cm. 2010.

 

나는 79세 직장인이다

장래원 79세. 대구시 북구 관음동

내가 일하는 곳은 대구 달서시니어클럽 한마음한손 사업장이다. 노인들이 모여 자동차부품 고무 밴드 끼우기, 식품 봉합하기 등의 일을 한다. 나는 부장을 맡고 있는데, 66세 동생부터 81살 된 형님까지 계시다.

보통 아침 9시에 시작해서 오후 4시면 일을 마친다. 우리 작업장에는 항상 웃음이 그치지를 않는다. 단순한 일이지만 이렇게 일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다들 굉장히 좋아한다. 나이가 들었어도 일할 수 있다는 것, 일터가 있다는 것,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 나눌 친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보람이 있고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일만 해도 건강을 되찾곤 한다.

한번은 딱 보니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왔다. 나이도 너무 들어 보였고, 며칠 못 살 것 같은 얼굴상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어떻게든 일하고 싶다 하여, 일을 하게끔 해주었다. 내심 이삼 일 하다 못 나오겠지 했는데, 열흘 한 달이 넘도록 일을 하는 것이다. 점차 병색이 사라지더니 완전히 건강한 새사람으로 변하였다. 일을 하며 청춘이 되살아난 것이다. 98세이신 할머니가 오신 적도 있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한 분이었다. 늘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면서, 자기 딸 아들 뻘 되는 선배(?)들에게 쉬는 시간이면 커피를 돌리곤 하셨다. 자기를 내세우지도 않으며 항상 웃으시니 애든 어른이든 누구나 좋아했다. 이렇게 밝게 긍정적으로 사시니까 장수를 하는구나 하면서 참 많은 걸 배웠었다.

부장인 내가 하는 일은 전체적인 관리다. 물건 입출고, 각자의 일을 조정하고, 하루 동안 한 일들을 개개인별로 통계를 낸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책임지는 역할을 하면서, 언제나 직원들을 격려하고 친절하게 하려고 한다. 그런 위치에 있다 보니, 더 맑은 정신을 갖게 되고 건강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 것 같다.

이곳에서 일을 시작한 것은 74세 때였다. 시니어클럽에서 사업장을 내기로 했을 때, 네 사람이 함께 개업을 했다. 시니어클럽은 정부에서 지원받아 작업실 운영을 해주고, 우리는 일한 만큼 월급을 가져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처음에 한 일은 커튼 고리를 끼는 것이었다. 우리가 가격도 싸고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자동차 부품 업계 등 연락이 오는 업체들이 늘어났다. 점차 사람을 모으고, 2호점을 냈다. 그리고 3호점, 4호점으로 늘어나 5년 사이에 17개 사업장, 1,070명으로 늘어났다. 지금은 7개 업체에서 물건을 대주어, 항상 일이 많다. 힘없는 노인들이라고 해도 열심히 하니, 2011년 한 해 동안에 매상 올린 게 4억9천4백만 원이다. 이렇게 우리 달서시니어클럽 일자리가 부흥되고 성장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처음에 일을 하러 오는 노인들에게 꼭 그런 말을 한다. 내가 이 나이에 뭐하겠어, 그러지 말고 언제나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고 일을 하자고 한다.

칠십 넘은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정부 기관에도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사실 이런 일자리가 없었다면 지금껏 살지 못했을 사람도 많다. 그렇게 일이란 중요한 것이다.

전국의 노인들에게 일자리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철 작 <나의 살던 고향은> 캔버스 위에 아크릴. 45.5×53.0c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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