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 취미 하나 쯤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바느질, 제2의 직업이 되다

김윤주 42세. ‘네모의 꿈’ 공방 운영. blog.naver.com/beaver55

나의 취미는 바느질이다. 그것은 어느새 나의 제2의 직업이 되었다. 17년 전 너무나 즐겁게 다니던 첫 직장을 육아 문제로 그만두게 되었다. 둘째를 임신하고 첫째 아이의 육아까지 모두 맡아서 해야 했기 때문에 갑작스런 육아 스트레스로 산전 우울증 같은 증상이 왔다.

그때 친한 언니가 잠깐이라도 태교 겸 취미 생활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렇게 배우게 된 게 퀼트라는 바느질이었다. 그전에야 워낙 바쁘게 살았기에, 취미 생활이라는 걸 딱히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바느질을 배우니, 워낙 만들기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너무 재미있었다. 새로 태어날 둘째를 기다리며 조각조각 원단을 잇고, 수를 놓고, 누벼서 아기 이불도 만드는 사이 우울감은 사라졌다.

둘째를 출산한 후에도 계속 바느질을 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옷이나 가방을 만들어주고, 소품을 만들어 주위에 나눠주는 기쁨도 컸다. 이 일을 또 다른 나의 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직장을 그만두면서 생겼던 상실감, 포기했던 꿈을 다시 바느질을 통해서 만들어가고 싶었다. 바느질을 전문적으로 해볼까 고민하던 시기에 신기하게도 배우고 싶었던 퀼트 선생님이 문화센터 강사 과정을 개설한 것이다. 그 과정을 들을지 말지 어찌나 고민을 하고 또 했는지. 수업을 듣는 동안 아이 둘은 어떻게 해야 하나, 수업은 잘 따라갈 수 있을까? 퀼트는 돈이 많이 든다던데, 맞벌이도 아니면서 감당할 수 있을까? 수많은 고민 끝에 결국 해보기로 선택을 했다. 2년 동안 강사 과정을 수료하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그만둘까 고민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 돌아보니 끝까지 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강사증을 딴 후, 퀼트 강사가 되어 문화센터에서 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가 만든 것들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2007년에는 아예 ‘네모의 꿈’이라는 바느질 공방을 공동 창업하게 되었다. ‘네모의 꿈’이란 네모난 조각 원단을 연결해서 가방, 장난감, 이불 등 뭐든지 만들어낼 수 있듯이, 여기서 꿈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지었다. 보통 손으로 만드는 홈패션과는 다르게 우리 공방은 재봉틀을 이용한다. 그러다 보니 속도도 빠르고 원단도 상당히 예쁘게 나온다.

우리 공방에는 다양한 분들이 바느질을 배우러 온다. 스트레스 많은 직장인이 바느질로 힐링의 시간을 보낼 때, 그리고 17년 전의 나처럼 육아 문제로 고민하다가 바느질을 알게 되어 좀 더 행복해지고 자기 자신을 예쁘게 꿰매는 사람을 만날 때, 나도 행복해진다.

혹시 과거 나처럼 힘들어하는 주부가 있다면, 우선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해보라고 하고 싶다. 그러다 보면 자기 안에 숨겨진 재능도 발견하고 새로운 꿈을 찾게 될 것이다.

육아 문제를 고민하게 했던 두 아이는 너무 잘 자라서 여전히 일하는 엄마를 이해하며 응원하는 지원군이 되었다.

되돌아보면 나의 유일한 취미인 바느질은 무생물이지만 17년 이상을 함께하며 즐겁고 힘들 때 바로 옆에서 나를 세워준 죽마고우 같은 존재다. 때로는 재봉틀로 스피드하게, 때로는 작은 바늘로 천천히, 내 인생을 예쁘게 꿰매고 있다.

바느질하는 사람은 심심하거나 우울할 시간이 없다. 뭔가를 늘 새롭게 만들고 꿰매고 바느질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곳적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바쁜 현대까지 바느질이 여인네들의 사랑을 받나 보다. 우리 바느질 한번 할까요?

아실 로제(Achille Laugé) 작.
Oil on canvas. 1909.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글을 써~

고욱향 58세. 주부. 전남 구례군 구례읍

취미도 참 많았다. 어릴 적 나의 취미는 쑥, 나물 캐는 거였다. 초등학교 때 학교 갔다 돌아오면 숙제는 하지 않고 내 키보다 더 큰 소쿠리를 들고서 들판으로 나갔다. 해가 질 때까지 쑥을 뜯었다. 그때 당시에는 쑥버무리를 많이 해서 먹었다.

중학교 때 취미는? 등산을 자주 다녔다. 일요일이면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산행을 하였다. 고등학교 때 취미는? 자전거 하이킹이었다. 커다란 자전거를 타고서 산들바람 맞으면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페달을 밟는 재미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울 할머니께서는 ‘가스나’가 겁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회초리로 때리시고 혼내기도 했지만.

자전거 타기를 그만둔 후에는 기차 여행을 좋아했다. 기차 타는 것을 좋아해서 열차 기관사한테 시집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어린 마음에. 호호~.

세월은 흘러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았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글 쓰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너무나 사랑했던 친정엄마가 2000년도에 돌아가셨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세상이 없어진 것 같았다. 병원에도 입원하고 악몽에도 시달렸다. 3년 동안 아팠다. 그러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엄마에 대한 시를 쓰고, 엄마하고의 추억을 썼다. 시골에서 같이 나물 캤던 것,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갔던 것…. 엄마하고의 추억을 글로 쓰다 보니까 마음이 서서히 풀려갔다.

그 후에는 매일매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겁나게 힘든 일이 있을 때도 쓰고, 지나가다 풀하고 대화한 것도 쓰고, 버스를 타며 느낀 것,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도 글로 썼다. 어린 시절 취미 생활을 하며 겪었던 많은 추억들도 글로 써내려갔다. 글을 쓰고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고 잡생각이 사라졌다. 외로울 때 친구가 되어주었다.

글을 쓴다는 게 참 쉽고도 어렵지만 슬퍼도 글을 쓰고 즐거워도 글을 쓰고 그냥 생각이 나는 대로 쓸 수가 있어서 참 좋은 취미인 것 같다. 글로 인해 좋은 일도 많이 생겼다.

한번은 여고 졸업할 때 할머니가 싸온 퉁퉁 불어버린 짜장면을 먹던 추억 등을 써서 라디오 프로그램에 기고를 했다. 그랬더니 라디오에 방송되고 선물도 받았다. 엊그저께는 36년 만에 고등학교 후배를 만났다. 나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인터넷에 내가 기고하는 글을 보고 찾게 된 것이다.

그냥 쓰고 싶을 때 쓰고 나서 읽어보면 서툴고 부족한 점이 많이 있다. 그래도 있는 그대로 편지글을 써서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딱 붙여서 우체통에 쏘~옥 집어넣는 재미도 있다. 글 쓰는 취미 땜에 지금도 월간<마음수련>에 보낼 글을 쓰고 있으니, 룰루랄라~.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한 일상의 행복인가 싶다. 서투른 글이지만,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잊고서 욕심 없이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기쁨. 요즘 말로 ‘짱’이다.

아실 로제(Achille Laugé) 작.

내가 교통을 사랑하는 이유

박장식 17세. 학생. trainholic.kr.pe

나의 취미는 대중교통을 타고 곳곳을 다니는 것이다. 한강을 두 번 건너는 버스 463번을 타면 서울 여행도 한 방에 할 수 있다. 양재를 출발해, 도심을 거쳐 여의도로 가는 463번은 역삼동 테헤란로, 신사동 가로수길, 세로수길, 서울숲, 신당동 떡볶이타운,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손기정기념공원, 국회의사당… 등 시티 투어 버스보다 더 많은 관광지를 거쳐 간다. 그래서 463번의 별명은 1,050원짜리 서울 시티 투어 버스다.

이 더운 여름, 에어컨 ‘빵빵한’ 시내버스를 타고, 많은 걸 경험할 수 있으니 학생인 나에게는 더욱 안성맞춤이다.

이런 취미를 갖게 된 데는 아주 멋진 계기가 있었다.

중1 때 가족과 함께 정동진으로 밤 기차 여행을 갔다. 출발 시간을 기다리며 서 있던 한 열차. 그 열차 기관사님의 “타볼래?”라는 한마디에 들어가 본 기관실. 중1의 눈에 비친 기관실은 환상이었고 나중에 교통 관련한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 후에 틈만 나면 환승을 이용해 하루 종일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놀았다.

취미는 취미를 넘어 진로가 되었다. 교통에 푹 빠진 한 ‘중딩’은 좋은 고등학교를 뒤로하고 교통 특성화고에 진학하게 되었고, 교통학도가 되어 미래의 교통 현업에 종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ITS니 아프라 막스니 하는 전문적인 교통 단어도 사용하게 되었고 말이다.

점차 발을 넓혀 철도 동호회도 가입하고, 주제를 정한 테마 교통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서울 우리 집에서 대전까지 시내버스만 타고 이동해보기, 서울에서 가까운 간이역들 탐방하기, 지방 곳곳에 폐선된 열차역들 탐사하기, 지방 어딘가로 나간 다음 그 인근 교통 관련 포인트들 답사하기 등등이다.

점점 사라져가는 간이역들을 다니다 보면, 후세에 전할 수 없을 이 아담하고 멋진 역들의 풍경을 내 눈 속 뷰파인더에 오래 담아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작년 말에는 폐선된 부산 송정역에서 해운대역까지 탐방을 다녀왔다. 처음으로 혼자 가는 장거리 여행이었다.

점점 느린 교통은 버림받고 빠른 것만이 사랑받는 시대가 되어간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봇짐 메고 2주 넘게 오가던 길은 하루 안에, 반나절에, 그리고 네 시간 만에, 드디어 시속 300km의 속도로 두 시간 만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교통의 발달이란 빠르게 많은 것을 바꾸어놓는다.

반면 교통의 미학은 빠른 길 사이에 느린 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길,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길, 아니면 KTX를 타고 가는 길 사이에 쏙쏙 껴드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가는 길. 철도라는 두 가닥의 좁은 길을 쭉 직선으로 만들어 빠르게 오가는 열차도 있고, 굽이굽이 좌우로 허리를 틀며 느리게 오가는 열차도 있다. 잘 닦인 아스팔트 도로가 있는가 하면, 구불구불하니 자갈이 가득한 비포장도로가 있기도 하다.

이 길은 모두 연결된다. 고속도로는 어느새 국도가 되고, 국도는 어느새 지방도가 된다. 그 지방도는 다시 돌고 돌아 고속도로의 시점으로 돌아온다. 걸어가든 뛰어가든, 버스를 타든 외제차를 몰든 모두 한길을 지나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전혀 만날 일 없어 보였던 많은 사람과 만나고, 나이를 넘어선 친구가 된다. 이것이 내가 교통 여행을 통해 배운 것이다.

또한 교통이라는 취미를 통해서 나의 재능들도 하나하나 발견됐다. 블로그를 운영하며 나의 여행기를 올리고 개인적으로 팟캐스트에서 교통 라디오도 하고 있다. 짧은 17년 인생이지만 교통으로 배운 인생의 진리는 크다. 그것이 내가 교통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이유이다.

아실 로제(Achille Laugé) 작.
<Road with Flowering Almond Trees>
54×77cm. Oil on canvas.

술과 음식, 두 마리 토끼 전문 사냥꾼의 자화자찬

홍경석 56세. 직장인. 대전시 동구 계족로

장마가 실종되어 더 무더운 즈음이다. 때문에 퇴근하여 귀가하자마자 나름의 여름나기 ‘비방’을 세웠다. 우선 동네 초입의 과일 가게에서 사온 자두를 안주 삼아 냉장고에서 꺼낸 소주에 얼음을 타서 마셨다. 이름하여 이열치열(以熱治熱), 아니 ‘이냉치냉(以冷治冷)’! 평소 나의 ‘취미’는 이처럼 일주일에 1~2회 음주하는 것과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다만 음주와 음식 만들기의 ‘참여 수준’은 고작 ‘취미스런’ 아마추어 수준이란 걸 먼저 강조코자 한다.

아무튼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볼일이 있어 친정에 갔던 아내가 들어섰다. 그러면서 아니나 다를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웬수야, 저녁도 안 먹고 또 빈속에 술 마시는 겨?” “응, 소주는 빈속에 채워야 더 맛나는 겨. 그나저나 저녁은 먹고 온 겨?”

구시렁거리는 아내를 치지도외하며 소주를 한 병 더 마셨다. 그러자 아내의 지청구는 더했다. 순간 얼마 전 일독한 <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에서 본 세조와 정인지의 끈끈한 ‘주당 의리’가 떠올라 미소가 양미간에 걸렸다.

세조 때 영의정 정인지는 술에 취하여 임금인 세조에게 감히 “너”라고 부르는 불경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술을 마시면 그럴 수도 있는 법이라며 용서했다고 한다.

물론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일정 기간 귀양을 보내긴 했다지만. 이 책에 따르면 또한 반대로 술에 취했는데도 실수가 없었던 어효첨을 기특하게 본 세조는 그를 이조판서에 임명했다고 하니 역시나 술은 과유불급이 최선이지 싶었다.

여하튼 세조가 정인지를 용서한 걸 보면 그가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단순히 극악무도한 인물은 아니라 때론 대장부이기도 했다는 셈법이 슬며시 엿보인다.

그랬거늘 아내는 왜 늘 내가 술을 마실 때면 잔소리를 그리도 그치지 않는 것일까? 각설하고 술을 꽤 마셨음에도 안주가 달랑 과일인 자두뿐이었는지라 밥배(밥을 먹거나 들어가야만 양이 찰 배)는 고프기에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곤 아침에 내가 만든 꽁치 열무찌개를 데워서 약간의 밥과 함께 먹었다.

오늘 아침, 건강이 안 좋은 아내의 조반상 차리기 역시 내가 할 일이었다. “여보, 꽁치 열무찌개 먹을 텨, 아님 호박잎에 감자와 호박까지 들어간 걸쭉한 된장찌개 먹을 텨?” 아내는 아침부터 생선 비린내는 싫다며 후자의 음식을 원했다. “잠깐만 기다려, 곧 데워서 대령할 테니까.” 삶은 호박잎과 감자 호박 된장찌개 또한 나의 ‘작품’이다. 이제 다음 달이면 이사한다. 그래서 아들과 딸도 그에 맞춰 이사하는 집으로 온댔다. 그래서 말인데 아이들도 인정하는 나의 음식 솜씨는 수십 년 간 축적한 내공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생후 백일 즈음에, 너무도 일찍 어머니를 잃었다. 홀아버지께선 늘 술만 드셨고 공부 잘했던 나를 중학교조차 보내주지 않으셨다. 대신 소년 가장이 되어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를 경험하였다. 그러면서 오로지(!) 먹고살아야 했기에 식당서 밥을 사먹으면서도 주방 아줌마의 음식과 반찬 조리 노하우를 나름 머릿속에 저장하는 걸 습관화했다.

세월은 여류하여 나는 50대 후반이 되었고 두 아이는 당장에 결혼을 하여도 전혀 하자가 없는 낙낙한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올 초부터 아내가 더욱 건강을 잃으면서 나는 지금도 주부가 해야 하는 일을 모두 하고 있다. 밥이야 전기밥솥이 짓지만 반찬 만들기와 설거지, 빨래와 청소 역시도 내 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상, 술도 잘 마시고 음식도 잘 만드는 이른바 ‘두 마리 토끼 전문 사냥꾼’의 자화자찬이었다. 아이들이 집에 오면 녀석들도 좋아하는 치즈 얹은 떡볶이를 모처럼 또 멋들어지게, 아니 ‘맛들어지게’ 만들 요량이다.

아실 로제(Achille Laugé)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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