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모처럼 마감 회의가 빨리 끝나고 차도 안 막혀서 평소 퇴근 시간보다 집에 40여 분 빨리 도착했습니다. 현관문을 들어서기 전 아내에게 문자가 옵니다. “오늘도 많이 늦을 거 같다.” 요즘 아내 회사의 기계 교체 작업으로 업무가 많이 늦어지는 바람에 며칠 계속 아내가 늦었습니다. “송이랑 밥 챙겨 먹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이 조용합니다. 누님 집에 다니러 간 부모님 방은 일주일째 굳게 닫혀 있습니다. 고1 아들 녀석은 학원에 가 있을 시간이고 중2 딸아이도 이웃에 사는 이모 집에서 저녁 먹고 오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안 계십니다… 아내가 저보다 늦게 퇴근한 적은 몇 년 만에 이번 주 이틀이 처음입니다… 학원 시간대가 틀린 남매가 함께 집에 없는 적도 참 오랜만입니다… 항상 여섯 식구가 북적이던 집이……. 그리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혼자 집에 있어본 적이 언제였던가를 떠올려 봅니다. 백만 년은 된 거 같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외쳤습니다… 앗~ 싸~~~

옷을 벗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반바지로 갈아입고 속옷을 챙겨서 화장실로 갔지만, 그냥 아무것도 안 챙기고 아무것도 안 입고 거실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갔습니다. 화장실 문도 열어 놓고 샤워를 했습니다. 콧노래도 한번 흥얼거렸습니다.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거실로 나왔습니다. 몇 분을 그냥 그렇게 서성였습니다. 환기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옷을 입고 창문을 열었습니다. 저녁 공기가 상쾌합니다.

밥 생각도 없이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를 주섬주섬 챙겨 컴퓨터 전원을 켰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노출 수위가 어쨌느니 저쨌느니 했던 영화 한 편을 다운받기 시작했습니다. 10분 걸린답니다.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감자칩 하나를 입에 넣었습니다. 바삭~ 하고 씹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습니다. 정말 정말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운로드가 5분여를 지날 쯤 갑자기 작은 방 문이 열립니다. 무슨 공포 영화에서처럼 삐거덕거리며 조금씩 열린 것도 아니고 그냥 퍽~ 열리더니 시커먼 물체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10여 년 가까이 들었던 말을 그 시커먼 물체가 합니다.
“다녀오셨습니까.”
아들 녀석에게 인사받고 욕한 건 첨입니다.
“깜짝이야, 썅.”
정말 놀래 죽는 줄 알았습니다.

백일성(43)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 최근 <땡큐, 패밀리>를 출간했습니다.

아침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학교 갔다 와서 약 먹고 쭉 자는 바람에 학원은 못 갔다고 합니다.
“노크하고 나와야지, 놀랬잖아 시끼야~”

말도 안 되는 말에 아들 녀석이 대꾸도 안 합니다.
사춘기 아들 녀석 방을 열고 아들 녀석이 깜짝 놀라는 그림은 많이 봤어도 방에서 나오는 아들 녀석 때문에 43살 먹은 아빠가 놀래서 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군것질거리를 다시 집어넣고 아들 녀석과 같이 먹을 저녁상을 차렸습니다. 계란 프라이를 하려는데 아들 녀석이 안방에서 나오며 한마디 합니다.
“아빠… 바탕화면에 영화 같은 거 받지 말라니까요… D 드라이브에 받으라니까요.”
계란 깨다 말고 슬쩍 안방으로 갔습니다. 컴퓨터 모니터에 서류철이 날아갑니다.

[두여자.avi 파일이 바탕화면 폴더에서 D: 영화 폴더로 15초 남았습니다] 아들 녀석이 친절하게 옮겨 줬습니다. 이런…….

그래도… 밤에 피곤한 아내랑 봤습니다. 두 여자 사이에서 바람피우던 남자가… 추운 겨울에 객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내가 제 머리를 한번 쓰다듬으며 한마디하고 잠듭니다. “영화 참 교훈적이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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