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전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 보관돼 있던 화첩은 2005년 영구 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반환되었고, 8년 만에 그 전모를 공개하게 된 것이다. 전시회와 함께 화첩을 최대한 재현한 영인복제본, 화첩의 환수 과정과 학술적 의미 등을 담은 단행본이 출간되는 등 관련 자료 및 연구가 집대성된 것도 큰 의미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라 불리는 겸재 정선(1676~1759). 어떻게 그의 화첩은 독일로 가게 되었을까?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었을까? – 편집자 주

‘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전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월 2일까지 열린다. 엮어진 화첩 특성상 한 번에 펼칠 수 없어 매주 화요일 한 면씩 교체돼 선보인다.

한국 문화를 사랑했던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

1973년 당시 독일에서 공부 중이던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는 논문을 준비하던 중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1927년에 발간한 <한국의 금강산에서>라는 책에 3폭의 겸재 그림이 실린 걸 보고 놀란다. 1975년 그 실물을 찾아 독일 오틸리엔수도원까지 간 그는 무려 21폭이 담긴 <겸재정선화첩>을 발견하고 숨이 멎는 듯했다고 전한다. 어떻게 겸재의 그림들이 독일 한 수도원에 있게 된 것일까.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는 독일 오틸리엔수도원의 초대 총아빠스(대원장)였다. 그는 선교를 위해 1911년, 1925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였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일제 강점기 하에 있었고, 그는 한국의 아름다운 미적 감성들이 말살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등 두 권의 책과 두 편의 기록 영화까지 만들며 한국 문화의 보존을 위해 노력했다.

성직자이자 화가이기도 했던 그는 특히 금강산에 매료되었다. 1925년 6월 금강산을 여행한 베버는 일본인 화가와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들을 접한다. 그리고 일본인 화가의 ‘만물상도’와 겸재의 ‘금강내산전도’에 대한 비교를 책에 싣기도 했다.

‘일본인 화가가 다만 자신의 정신 속에 각인된 이 거대한 파노라마를 비단 폭 위에 모방하려는 의도만 있는 데 반해 한국인 화가는 계곡과 깊은 골짜기에 감추어진 산벼랑과 봉우리들에서 바라볼 수 있는 크고 작은 사찰들과 암자들까지 빼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중략) 금강산의 한국적 조형 방식은 ‘금강산의 전체적 특성을 재현’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금강산에서> 중에서

<겸재정선화첩>의 내용을 보면 주제와 분야, 작품의 격조, 제작 연대 등에 차이가 있다. 즉 출처가 다른 그림들을 베버 신부가 수집해 한국의 화첩 방식으로 성첩하여 독일로 가져간 것이라 추측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문화재는 일본, 미국, 중국 등 20여 개국에 대략 15만 점 이상이 유출되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중에 환수된 것은 9,760점에 불과하다.(2013년 10월 기준) 많은 문화재 반환 사례 중에<겸재정선화첩>의 반환은 독일과 한국 가톨릭 수도원 간의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깊다. 오랜 세월 동안 세 번의 전쟁, 두 번의 화마 속에서도 살아남은 화첩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되고 있다.

숨 막힐 듯한 걸작 <겸재정선화첩>의 의의

<겸재정선화첩>은 진경산수화뿐 아니라 사의산수화, 고사인물화 등 다양한 화제(畵題)와 화풍을 담고 있어, 정선의 예술 세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화첩이다. 겸재는 중국풍의 화풍에서 벗어나 우리 산하를 우리만의 기법으로 표현하는, ‘진경산수’라는 크나큰 성취를 이루어낸 ‘화성畵聖’이었다.

특히 겸재가 평생 가장 심혈을 기울여 그린 것은 금강산이었다.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어우러져 계절 따라 다른 절경을 연출하는 금강산은 조선의 긍지와 주체성의 상징이었다. 한눈에 보이지 않는 금강산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겸재가 그린 한 폭의 그림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겸재 화첩의 존재가 영미 미술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99년. 케이 E. 블랙(전 미국 덴버미술관 동양미술부 연구원)과 에카르트 데게가 함께 쓴 논문이 <오리엔탈 아트>라는 미술 전문지에 실리면서다. 케이 E. 블랙은 겸재의 그림을 보고 ‘숨 막힐 듯한 걸작’이라 감탄했다. 이후 화첩을 보기 위해 세계 각국의 경매 회사들이 수도원을 찾았고, 뉴욕의 크리스티는 예상 경매가 ‘50억 원대’라는 말을 흘리며 경매에 부치게 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를 돈으로 거래한다는 것을 옳지 않게 여긴 수도원에선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화첩의 귀환, 한국의 영혼 한 부분이 돌아오는 것

2005년,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오틸리엔수도원은 한국의 형제 수도원인 왜관수도원에 영구대여 형식으로 화첩을 돌려줄 것을 결정한다. 왜관수도원 선지훈 신부 등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반환 결정 당시 제6대 대원장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의 ‘담화문’ 중 일부를 소개한다.

‘나의 선임자인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 문화에 심취한 분입니다. <겸재정선화첩>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당시 선교 활동을 통해 한국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처음부터 한국 문화에 대해 존경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진정으로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사랑했습니다. 저희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이 화첩이 한국에서 더 많이 사랑받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반환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중략) 저는 화첩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미술사학자인 이정희 박사는 ‘한국의 영혼 한 부분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가슴에 와 닿는 무척 감동적인 표현입니다. 화첩 반환이 보도된 후 한국인으로부터 감사의 이메일을 많이 받았습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와 기쁩니다. (중략) 화첩이 고향에서 많은 사랑을 받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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