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펴고 크게 웃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가장 빛났던 내 인생의 전성기입니다.

절망의 순간에 나를 울린 할머니와의 밥상

이정숙 57세. 전북 군산시 조촌동 21통 통장

“이통장! 이통장! 이통장 있어?!” 여느 동네와 달리 우리 동네는 이런 소리와 함께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오늘도 어김없이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가신다.

사소한 문제부터 중대한 문제까지 할머니들은 나를 찾아와 이야기를 해주신다. 그러면 나는 당연지사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어떻게든지 해결해 드리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나를 ‘대단하다’ ‘자네 같은 사람이 어디 있냐’며 추켜세우지만 나는 그 일이 그렇게 칭찬받을 만큼 잘한 것이지는 모르겠다. 나에게 오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신다는 것이 나를 믿어주시는 거라 생각되어 오히려 내가 더 고마움을 느낀다.

내가 아주 깊은 터널에서 아무것도 안 보이고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에 그분들에 의해서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왔다고 나름 자부해왔다. 그런데 한순간이었다. 눈 깜짝할 새도 없이 허물어졌다. 남편의 사업이 IMF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20년 넘게 가꾼 나의 가정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나름 강한 사람이라고 자부했던 나는 그야말로 공황 상태가 돼버렸고, 말 그대로 길바닥에 나앉을 상황이 되었다.

뭘 어떻게 손을 대야 하는지, 무얼 해야 하는지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내 자신도 추스를 기력이 없어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기를 몇 달. 생전 입에도 대지 않던 술도 먹어보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어도 보고, 다리가 끊어질 정도 무작정 걸어보기도 했지만 답이 안 나왔다. 이젠 뭘 해먹고 살아야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때껏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았을까. 사춘기에도 안 해본 나의 인생에 대해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론은 희망이 아닌 좌절 쪽으로 기울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암담함이란.

그러던 어느 날, 집을 나서다가 우연히 동네 할머니 한 분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할머니가 아직 식사를 안 하셨다는 말에 집으로 모시고 와 밥을 차려드렸다. 오랜만에 편안하고 따뜻한 밥상을 받았다는 할머니 말에 나는 그만 울컥했다. 사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내 스스로 상처가 치유되는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형편이 어려워 식사를 거르시는 동네 할머니를 한 분 두 분 모셔다 밥을 차려드렸고, 나중에는 열 분, 스무 분이 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할머니들께 밥 한 끼라도 해드리고 싶었던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특별한 기술이 없어, 족발집 배달부터 식당 일, 여관 청소, 찜질방, 대리운전까지 나를 써주시는 곳이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 돈으로 할머니들의 밥상을 차릴 수 있었다.

또한 발 뻗고 앉을 자리가 비좁아 집 화단을 밀어 ‘쉼터’라는 명목으로 방을 하나 만들었다. 그곳에서 할머니들이 식사하시고 앉아 담소라도 나눌 수 있었다. 조용하고 우울했던 우리 집에 이젠 사람들의 말과 웃음소리가 났다. 너무 보람되고 기뻤다.

할머니들과 친해지면서 나는 미용 기술을 배워 머리를 직접 손질해주고, 할머니들의 한글 공부를 위해 시청에 가서 한글 선생님을 보내달라고 부탁도 하고, 할머니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통장이 되었다. 할머니들의 문제를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싶어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취득하고, 대학교에 들어가 사회복지학도 전공했다. 자연스럽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게 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나의 활동이 입소문 나면서 후원하고 싶다는 분들도 찾아오게 되었고 동 직원들도 할머니의 어려움을 발 벗고 해결해 주려고 하시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지금의 나는 이렇게 웃고 살고 있다.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하고 인생이 즐겁다.

어르신 쉼터를 만든 지도 13년이 되어간다. 낮에는 스무 분 정도의 어르신이 이곳에서 생활하신다. 어르신들과 같이 생활하기 위해 헌옷과 책 폐지를 수거해 파는 등의 일을 하며, 부지런히 생활비도 번다. 내년에는 문예교육사 자격증을 따서 할머니들께 한글도 직접 가르쳐드리고 싶다.

뜻하지 않은 시련이 나를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으로 만들었다. 지금 현재 나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는 내 인생 최고의 삶을 살고 있다고 감히 말해본다.

신수원 작.
<작은 별>
53×46cm. Acrylic, oil pastel on canvas. 2014.

청춘이라 불리는 두 딸에게 소망한다

소광숙 49세. 작가,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 저자

돌아보면 굽이굽이 되돌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둘로 난 길에서 하나를 선택해 살았지만 때로는 가지 않은 길이 내가 걸었어야 할 여정이었다는 생각도 들고, 또 발 들여놓은 길에서 좀 더 성실했어야 한다는 미련이 남기도 한다.

1980년대 중반,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나는 세상과 나에 대해 수많은 ‘물음표’를 던지며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도서관과 최루탄 가스 언저리를 오가며 난 어느 색의 옷을 입고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물었다. 흰색도 검정색도 아니었다. 그 중간 어디쯤에서 어정쩡하게 회색 옷을 걸치고 있었다. 시간은 고민하며 주춤거리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느새 졸업을 하고, 스스로의 삶을 책임져야 할 위치로 내밀렸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정 안 되면 선생님이나 되어야지 하고 준비했던 교직 이수는 현실에서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독어과 선생님이 되는 길은 없었다. 구할 수 있는 일은 학원 강사 자리였다.

나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부모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어른이 되었다는 것에 미안해했다. 오로지 ‘대학’에 가기 위해 입시에 매진했고 성공적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4년이 흐른 후 나는 아무것도 없는 빈껍데기였다. 대학만 나오면 보장된 미래가 있을 줄 알았던 어리석은 시간들이 후회스러웠다. 그리고는 청소년들이나 하는 질문이라 여겼던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미래를 탐색한다는 명분으로 부모님 울타리에 여전히 머무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었다.

종종 나는 딸들에게 이야기한다. 결혼은 선택이라고. 하지만 나의 결혼은 그렇지 못했다. 나의 염치없음과 떨어진 자존감을 가리기 위해 선택한, 남들 모두 ‘그렇다’고 가는 길을 따라갔을 뿐이었다.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어 당당히 부모님에게서 독립하지 못하고 나는 결혼을 선택하여 부모님 곁을 떠났다. 미리 해보거나 연습해 볼 수 없는 것이 결혼 생활 아닌가! 자발적 전업주부의 삶을 선택한 결혼 생활은 내게 자유를 얻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더 깊이깊이 가두었다.

첫딸이 태어나고 굳은 마음 하나 준비하지 못한 채 나는 엄마라는 이름을 얻었다. 벗어나기 힘든 굴레였다. 내 나이는 청춘이라고 불리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하지만 내 곁에는 커다란 두 눈으로 나만 바라보는 아이가 있었다. 키워내야 하는 존재였다. 그때 과연 나는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눈이 부신 푸르른 청춘이었을까?

두려울 것 없이 세상에 마주 서 있는 것이 청춘이라면 나의 청춘은 이미 사라진 것이었다. 나는 어린아이를 안고 한없이 두려웠다. 문밖을 나서면 아카시아 꽃향기가 그리도 낭만적일 수 없었지만 세상에는 나와 아이 둘만 남겨진 것 같아 혼자일 때보다 더 외로웠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처럼 삶이 결연하지도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라는 노래 가사처럼 낭만적이지도 않은 일상이 흘렀다. 나는 아이를 등에 업고 ‘엄마 돼지 꿀꿀꿀, 아기 돼지 꿀꿀꿀…’과 같은 아이를 얼러줄 노래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그런 시간도 이제는 아련하다. 유치원 차에서 내리는 아이를 맞이하러 갈 일도 없고 친구와 놀이터에서 싸웠다고 씩씩거리며 돌아온 아이를 타이를 일도 없다. 큰딸은 어학 공부를 한다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 컴퓨터를 켰고, 작은딸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느라 방문을 닫는다. 청춘이라 불리는 데 어떤 어색함도 없는 스물둘, 스물다섯의 딸에게 나는 소망해본다. 아니 스물일곱의 청춘이었던 나에게 다시 말을 건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던 길을 멈추지 말기를. 죽을 것같이 사랑한다는 김수현보다 더 멋진 남자가 있더라도 자신보다 더 사랑하지 말기를. 그리고 청춘의 시간을 서둘러 끝내지 말고 길게 늘려 쓰라고. 꿈을 꾸라고. 현실에서 꿈이 없다면 잠 속에서라도 꿈을 꾸라고.’

나는 오랜 시간 선택한 것이 주는 의무와 책임을 다하느라 급급하게 살아왔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여전히 나를 묶고 있지만, 오늘 내가 걷고 있는 길을 나의 선택으로 여길 것이다. 이제 다시 꿈을 꾼다. 천천히 발걸음을 뗀다.

마흔이 넘어 대학원에 들어간 친구가 말했다. “팔팔한 20대 아이들과 지내려니 힘에 달려. 머리도 예전만 못한 것 같지. 외모도 신경 써야지….”

힘들다면서도 공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이는 친구에게서 청춘을 본다. 꿈을 이루려는 열정에서는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겁고 가벼운, 또 즐겁고 괴로운 삶의 여정을 걸어 이제 흰머리가 드문거리지만 새롭게 꾸는 ‘꿈의 무게’는 묵직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지금 ‘청춘’이다.

신수원 작.
<바둑이 방울>
53×73cm. Acrylic, oil pastel on canvas. 20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김성운 26세. 직장인. 인천시 연수구 송도동

나는 감사하게도 가진 것이 참 많다. 그중 몇 가지만 말해보자면 우선, 건강하다.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전거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어찌나 건강한지 심하게 잘 탄다. 기타도 잘 친다. 11년간 독학으로 배웠는데, 이제는 사람들 앞에서 몇 가지 곡은 연주할 실력을 갖췄다. 그리고 긍정적이고 밝아서 잘 웃는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건데, 잘생겼다.(^^)

하지만 이렇게 가진 것이 많지만, 남들이 아주 쉽게 가질 수 있었던 한 가지를 가지지 못했다. 바로 부모님이다. 어머니는 내가 4살 때, 집을 나가셨다. 생활이 어려웠던 아버지는 나를 보육원에 맡기셨다. 내가 11살이 되면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지만,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12살 때, 돌아가셨다. 그렇게 나는 혼자가 되었다.

보육원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보육원 형들의 괴롭힘 때문에 숱하게도 맞으면서 팔다리에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아버지가 거두어주셔서 보육원에서 나갈 수 있었지만, 큰아버지 집에서도 호되게 혼나고 맞으며 농사일을 해야 했다. 결국 중학생 때, 큰집에서 쫓겨나 자취 생활을 하게 되었다. 자취할 때는 하루에 학교에서 주는 급식 한 끼만 먹으면서 살았다. 빨래도 제대로 하지 못해 매일 꼬질꼬질한 교복 한 벌 입고 다니는 것이 다였다.

나는 다시 보육원으로 들어갔다. 정말 끔찍한 곳이었지만,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새로 들어간 곳은 다행히 예전과 같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다들 잘해주자, 나는 마음이 안정되었고,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꿈과 목표도 갖게 되었다. 살아갈 길이 공부뿐이라고 생각한 나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했고, 결국 서울대 동물생명공학과에 들어갔다.

이러한 경험으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삶에 대한 긍정만 있으면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도 많이 하면서 점점 생활이 나아지자, 이제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나와 비슷한 환경의 아이들에게 그들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고 싶었다. 보육원에 사는 아이들은 만 18세가 되면 살던 곳을 떠나 혼자 살아가야 한다. 누구보다도 그들의 어려움을 잘 알기에,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립과 꿈에 대한 강연을 하는 봉사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작은 도움이 되고자 시작한 일이었지만, 아이들이 희망을 품는 걸 보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자는 꿈을 갖게 되었다.

사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나에게 상처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강연을 하면서 나의 어린 시절의 아픔이 치유되고, 위로받으며, 행복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처를 나누면, 점차 아물어간다는 것을, 그리고 그 나누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상처도 어루만져 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렇게 살아오면서 나에게 좌우명과 같은 말이 하나 생겼다.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내가 만약 부모님이 없다는 것에, 외롭다는 것에, 가난하다는 것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인생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다면, 지금의 나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일들에 감사하면서, 비록 현실은 정말 좋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고, 열심히 노력해서 이겨낼 수 있었으며, 점점 행복한 사람이 되고 있다. 올해는 원하던 기업에 취직도 하여 신입 사원으로서 많은 걸 배우고 있다. 매 순간 내 인생의 행복한 때를 만들어가고 있다.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 삶이 원하는 대로 잘 살아지지 않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내가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은 시련과 역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의기소침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이겨낼 수 있고, 행복해질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신수원 작.
<꿈꾸는 마음>
38×45.5cm. Acrylic, oil pastel on canvas.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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