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펴고 크게 웃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가장 빛났던 내 인생의 전성기입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늦깎이 학창 시절, 주부학교

장미숙 50세. 주부. 서울시 송파구 장지동

며칠 전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날 오래전 추억 속으로 데려갔다. 전화를 한 사람은 중학교 3학년 때 짝꿍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전혀 연락을 못 하고 살았으니 35년 만에 처음으로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나도 그 친구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먼저 소식을 전해온 친구가 반갑기 그지없었다.

“난 네가 공부 잘했던 게 가장 생각나. 시험이 다가오면 네가 항상 요점 정리를 해줬잖아. 그러면 진짜 그 부분이 시험에 나왔다니까.” 친구는 날 공부 잘했던 짝꿍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기억하고 있는 친구가 고마웠다. 친구는 덧붙였다.

“그런데 넌 고등학교를 어디로 갔니?” “나? 고등학교 못 갔잖아. 우리 집이 엄청 가난했던 건 모르지? 학교 대신 공장에 다녔어.” 내 말에 친구는 “아! 그랬었구나. 네가 공부를 잘해서 계속 공부를 한 줄 알았어” 하며 미안해했다.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때 고등학교 못 갔지만 나중에 다시 공부를 하게 됐어. 고등학교도 가고 대학도 졸업했지.”

나는 친구에게 내가 살아온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추억을 나눴다.

그랬다. 꿈 많던 소녀 시절, 나는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중학교만 졸업하고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닐 때, 나는 공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참으로 우울한 날들이었다. 과도한 노동으로 얼굴은 노랗게 뜨고,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은 날 위축시켰다. 그나마 내가 번 돈으로 동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어 그게 낙이었다. 공부를 못 한 설움이 내게는 한으로 남아 언젠가는 다시 공부를 할 거라는 다짐을 한 번도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살았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내가 다시 책가방을 든 건, 나이 마흔이 넘어서였다. 두근대는 가슴을 다독이며 모교에 첫발을 디뎠던 그날의 감동은 지금도 가슴속에 생생하다. 파릇파릇하고 발랄한 청소년들이 아닌, 동글동글한 몸매와 구불구불한 파마머리에 책가방을 든 학생들이 공부를 하기 위해 드나드는 곳, 교문도 운동장도 없는 그곳은 주부학교였다.

갑자기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나는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만큼 바빠졌다. 주부, 엄마, 아내, 며느리, 딸에 학생이란 역할까지 주어졌으니 그야말로 시간이 금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말 못 할 사연들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떳떳하게 밝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누가 알까 봐 경계를 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학력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마흔 살까지 따라다니던 중졸이란 학력에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모든 걸 배제하면 그곳은 열정과 재미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시끌벅적한 교실은 아이들 못지않게 아줌마 학생들의 수다로 들썩거렸고, 공부 시간만큼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빛을 발했다. 정규 고등학교가 아니라 고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봐야 했기 때문에 나는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난 뒤에는 공부보다는 반원들과의 추억을 만들기에 더 바빴다. 꿈에 그리던 소풍을 가게 되었고, 연말에는 반별 대항 장기자랑 송년회준비를 하면서 반원들과의 우정을 돈독히 쌓을 수 있었다. 인생을 살 만큼 살아온 분들이 대부분이라 장기들도 많았다.

우리 반은 송년회 때 각설이타령과 댄스를 하기로 했다. 나는 반원들 중 젊은층(?)에 속해서 내가 총대를 멨다. 왕언니들에게 댄스를 가르치는 일은 정말 개그 무대를 방불케 했다. 덕분에 연습을 하면서 우리는 매일 배꼽이 빠졌다. 웃다가 혼절하지 않을까 염려가 될 지경이었다. 최종적으로 의상을 맞춰놓고 드디어 송년회 밤이 되었을 때 우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이 지긋한 아줌마들은 어디 가버리고 모두가 소녀 같았다. 귀여운(?) 언니들을 격려해가며 우리는 무대에 올라 마음껏 감춘 끼를 발산할 수 있었다. 떨려서 못하겠다던 몇몇 언니들은 몰래 술을 두어 잔씩 마시고, 발그레해진 얼굴로 무대에 올랐다. 잊지 못할 밤이었고 열광의 도가니였다.

우리 반은 대상을 차지했고 후배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을 수 있었다. 오십여 년을 살아오는 동안 그토록 열심히 뭔가에 도전해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너무 짧았던 시간이어서 아쉬움이 컸지만, 내 삶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수놓을 수 있었던 늦깎이 학창 시절은 바로 나의 전성기였다.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나는 소원했던 대학 공부를 하게 되었고, 꿈에 그리던 졸업장을 가슴에 안을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의 시초가 주부학교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신수원 작.
<옹달샘>
72.5×60.5cm. Acrylic on canvas. 2012.

작은 시골 고등학교에서의 기숙사 생활

문귀애 22세. 대학생. 대구시 북구 태전동

나는 4개의 반으로 이루어진 시골의 작은 고등학교에 다녔다. 우리 학교는 말은 자율이지만 실상은 강제인 야간 자율 학습을 실시했다. ‘야자’가 끝나면 집에 가야 하는데, 집에 가려면 가로등 하나 없는 산과 고속도로 사이를 지나가야 했다. 너무 무서웠던 나는, 결국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첫 룸메이트들과는 생각보다 맞지 않았고, 너무 힘이 들어 기숙사를 나올까도 진지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6개월마다 한 번씩 방이 바뀌었기 때문에 꾹 참고 생활을 했다.

시간은 흘러 2학기가 되었고 새로운 방이 배정되었다.

이때부터가 내 인생 전성기의 시작이었다. 바뀐 방 사람들 모두 나와 너무 잘 맞았다. 야자를 끝내고 오면 같이 컵라면도 끓여 먹고, 몰래 치킨도 시켜 먹었다. 밤 12시, 생일을 맞은 친구를 위해 깜짝 생일 파티도 하고, 사감 선생님의 눈을 피해 심야 자습 시간에 방으로 돌아와 농땡이를 피우기도 했다. 새벽에 친구들과 수다를 떨 곳이 없어 공용 샤워실 탈의실에 모여 앉아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3학년이 되었을 때는 기숙사 체제가 바뀌면서 고3끼리만 방을 쓰게 되었다. 나는 우리 반 친구 6명과 다른 반 친구 2명과 같은 방에 배정되었다. 게다가 고3을 모두 같은 층에 넣었기 때문에 층 전체가 고3이었고, 모두 친한 친구들이었다.

마치 내 세상을 얻은 것만 같았다. 주말이면 일요일 자습을 끝내고 걸어서 15분 거리인 우리 집에 다 같이 걸어가서 밥도 먹고, 급식소에서 남은 반찬과 밥을 받아와 야식으로 먹기도 했다.

고3이 되며 배정된 기숙사 방은 졸업할 때까지 유지되었고, 그 친구들과 함께  1년이나 같은 방을 썼다. 대학교 원서를 쓰고, 합격의 기쁨과 불합격의 슬픔을 함께 나누며 성장하였다.

수능 D-200일을 기념하며 술을 먹다가 걸려서 벌 청소를 한 방도 있었고, 도난 사고가 일어나 기숙사가 발칵 뒤집힌 방도 있었고, 공용 냉장고에서 음식이 사라지는 일도 있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정말 많은 추억을 쌓은 곳이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힘든 일도 많았고, 그만큼 즐거웠던 일도 많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힘든 일들이 많아서 조금 즐거울 일도 더 즐겁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또 오더라도 지금은 그때만큼 즐겁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교에 와보니 고등학교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 역시도 처음에는 그랬다. 대학교라는 곳은 생각보다 지루했고, 냉정했고, 외로웠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생 시절이 그리워지곤 했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아직 짧은 인생을 살아온 내가 섣불리 고등학생 시절이 전성기였노라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우스워 보일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고등학교 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고, 더 가슴 벅찬 일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내가 생각하는 나의 전성기가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새로 쓰여지고 있는 나의 전성기일지도 모른다.

신수원 작.
<엘리제를 위하여>
91×72.5cm. Acrylic on canvas. 2012.

버림 그리고 제2의 인생

박기영 60세. 수필가.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친정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어머니 사진을 꺼내보지를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방에다 모셔놓고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한다.

마음수련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부터는 죽음에 대한 태도도 많이 바뀌었고 삶을 편안하게 즐길 줄 알게 됐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 또한 유방암에 걸려 무척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연이어 충격을 받고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을 때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수련을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나는 사실 늘 나만 위해서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년간 독거노인분들을 위해 목욕 봉사를 하면서도, 나는 정작 우리 어머니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씻겨 드린 적이 있었던가.

늘 어머니께 효도해야지, 생각하면서도 막상 마음만큼 실천하지 못한 나는 얼마나 불효막심한 딸이었는지.

돌아보니, 남에게 봉사하는 것도 모두 나의 만족을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봉사하면서도 늘 뭔가에 목마르고 행복하지가 않았던 것도 내 만족을 위해서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나와 같이 사시면서 아픈 몸으로 집안일까지 도와주시느라 어머니는 얼마나 힘들고 고되셨을까. 마음으로는 늘 잘해드리고 싶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사무친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너무 집착하며 살았다. 아이들이 나를 외롭게 하고 섭섭하게 한 것에 원망도 많았지만, 내 마음을 바라보았더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어머니에 대한 나의 후회가 아이들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겠는가.

마음수련을 하면서 아이들에 대한 집착, 나만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냐는 원망, 어머니에게 진정으로 참회를 하고 잘해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버리고 나니 정말 홀가분해졌다.

버리려고만 하면 버려지고 이렇게 편한 것을 근심걱정을 끌어안고 아까워서 버리질 못하고 살았으니 얼마나 고통이었는지. 당시에 갖고 있었던 많은 문젯거리와 혼란스러운 것들에서 많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면서 나는 다시 제2의 인생을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예전에는 누가 별 의미 없이 한 말까지 의미를 알아내려고 많은 생각과 시간을 소비했다. 지금은 웃어넘길 줄 아는 방법을 알았으니 이 또한 감사하다. 버리면 편해지는 것을 알기에 나는 노력하며 나의 삶을 즐길 것이다.

삶에 좋은 계획이 있어 나를 이 세상에 내놓으셨는데 잡다한 생각과 지난날의 후회로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는가.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버리는 것을 선택한다.

삶을 즐길 줄 아는 방법을 배웠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버리면 버릴수록 매 순간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신수원 작.
<봄의 로망스>
53×72.5cm. Acrylic, oil pastel on canvas. 2013.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You may use these HTML tags and attributes: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 <strike> <strong>